구니키다 돗포 <쇠고기와 감자>를 읽고 과제 레포트 제출했습니다.

 


 

 

구니키다 돗포의 <쇠고기와 감자>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닌텐도 게임 <동물의 숲>의 마스코트 격 캐릭터인 너굴이었다. 플레이어에게 자택의 증축을 강권하여 수백만에 달하는 돈을 벌어들이고,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부동산과 관광 등 각종 사업에 손대며 거금을 벌어들이는 NPC. 동물의 숲 시리즈 플레이어에게는 돈에 눈이 멀어버린 너구리라는 인식이 박혀 있을 정도다. 이런 너굴에게도 꿈과 이상이 자신의 모든 걸 지배하던 시기가 있었다. 젊었을 적 너굴은 꿈을 이루기 위해 고향을 떠나 도시로 향했지만, 콘크리트 정글과 같은 도시 세계에서 모든 걸 잃는다. 그는 소꿉친구의 위로와 격려도 거절하고 꿈만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며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쇠고기와 감자>에 빗대어 보자면, 본래 홋카이도 이주를 동경했으나 결국 현실에 안주하게 된 가미무라와 비슷한 처지인 것이다.

<쇠고기와 감자>에서 가미무라는 홋카이도 이주에 관해 이야기하며 자신이 현실에 안주하게 된 계기를 설명한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가미무라는 청교도인을 자처하고 홋카이도 이주라는 이상을 꿈꾸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홋카이도에 도착해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이상과 전혀 달랐고, 가미무라는 1년 만에 홋카이도를 떠나 이상을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이때 가미무라를 포함한 등장인물들은 현실과 이상을 비프 스테이크의 쇠고기와 부속물인 감자로 비유한다. 쇠고기는 스테이크의 주요한 재료이고 감자는 그 부속물로, 아주 중요한 재료는 아니라는 점에서 착안한 비유다. 가미무라는 자신이 이상을 좇다가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로 스스로를 쇠고기당이라고 지칭한다.

사람에게 어느 정도 이상이 있다는 건 그 사람이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미무라의 현실주의적인 태도를 마냥 세속적이라고 비판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가미무라가 감자보다 쇠고기를 택하게 된 건 가치관이 바뀔만한 상황을 겪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어느 정도의 현실주의는 이상을 이루기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 현실을 직시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힘을 키울 방안을 찾아가는 것이 무턱대고 이상을 좇는 것보다 성공률이 높기 때문이다.

예의 가미무라는 쇠고기를 먹는 게 더 편하고 즐거운 길이라는 뉘앙스로 가볍게 말했지만, 조금 더 무겁게 이야기해 본다면 생존을 위해서 세속주의는 필요하다. 가령 전술했던 너굴의 경우에도, 작품 내외적으로 속물이라고 비난받고 있지만 잔혹한 도시의 세계에서 크게 데이고 모든 걸 잃은 사람은 세속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가미무라의 경우에는 홋카이도에서 현실의 벽을 마주하고 돌아왔을 뿐이지만 이상만 추구할 경우 너굴처럼 모든 걸 잃어 더 이상 이상을 추구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사람은 현실을 직시하고 이상을 실현할 기반을 다져야 한다. 가미무라의 친우였던 가지무라가 감자보다는 쇠고기가 자양분이 많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현실을 추구하는 것은 스스로의 능력을 다지고 이상을 추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무턱대고 이상을 추구하기보단 자리가 잡힐 때까진 현실을 추구해야 일말의 이상조차 잃은 비인간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다. 너굴이 도시에서 모든 걸 잃고 돌아와서 세속적인 사람이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젊었을 적의 패기를 조금만 더 가라앉히고 더 많은 걸 준비하여 도시로 향했다면 지금만큼 속물로 지칭되며 사람들에게 비난받지 않았을 것이다. 가미무라 또한 현실적인 기반을 다지고, 홋카이도의 부정적인 일면까지 공부하고 조사했더라면 그 때 같은 실패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윤희에게> (2019) 포스터

 

영화 <윤희에게>. 최근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로 열연 중이신 김희애 배우님이 주연으로 등장했던 퀴어 영화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의 임대형 감독님의 두 번째 작품이네요!

개인적으로 김희애 배우님을 정말 좋아해서, 김희애 배우님이 퀴어 영화를 찍는다고 하셨을 때 너무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전공도 일본어에 일본인을 짝사랑했던 적도 있는데다, 아무래도 퀴어 당사자였기 때문에 영화를 8번이나 볼 만큼 저에게 정말 의미있는 영화였던 것 같습니다.

수능이 끝나고, 김희애 배우님이 퀴어 영화를 찍는다고 해서 흥분했던 기억이 나네요! <밀회>를 보며 배우님께 '입덕'하고 온갖 필모그래피를 정주행하던 와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퀴어 영화를 찍는다니... 사실 한국에서 이만한 대배우가 퀴어 영화를 찍는 경우는 많이 없다고 생각했어서 제 친구들도 모두 흥분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윤희에게가 스크린에서 개봉되기까지의 1년. 작년 11월에 개봉을 하자마자 학교 근처 메가박스에서 영화를 봤고, 이후 이런저런 GV에 참석하기까지.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것만 세어보면 8개쯤 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GV였나... 감독님께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감독님 본인도 그만큼 본 적 없다고 하셨던 ㅋㅋㅋㅋㅋ 게 기억에 남네요!

아무튼 2019년 하반기를 풍족하게 채워준 <윤희에게>. 영화를 '덕질'하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학교 기숙사가 서울이랑 조금 멀어서, 롯데시네마에서 했던 GV는 막차를 놓쳤고... 어떤 GV에서는 한참 연락 안 되던 지인과 눈이 마주쳐 머쓱했던 기억. 처음으로 <윤희에게>를 보고 나오는데 첫눈이 내렸던 기억도 나네요! 이전에 짝사랑했던 일본 분이 돌연 생각나서, 이어폰을 꽂고 OST를 들으며 그 분을 만났던 장소를 걸었던 것도 같네요. 엄청난 청승 -.,-

 

<윤희에게> 시나리오북과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진행되었던 상영회 티켓

 

시작부터 저에게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지만, 인상깊었던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같은 반이었던 카타세 쥰을 사랑했던 윤희는 당대 보수적인 시선 때문에 쥰과 헤어져야만 했습니다.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쥰은 부모님의 이혼에 따라 일본으로 넘어와야만 했고, 윤희는 여자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쥰은 홋카이도에서 수의사가 되고, 윤희는 오빠가 소개해 준 남자와 결혼해 새봄이라는 딸을 낳게 됩니다.

결국 남편 인호와 이혼한 윤희, 그리고 그런 윤희와 새봄에게 문득 찾아온 쥰의 편지. 윤희와 새봄은 그 편지와 함께, 홋카이도에 있는 쥰의 자취를 좇아 여행을 떠납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장점 중 하나는 자극적이지 않고 정적이라는 점인 것 같습니다. 자극적인 영화는 그 영화 나름의 매력이 있기도 하지만, 그런 영화들 사이에서 흔하지 않은 '정적이고 감동적인 영화'가 바로 <윤희에게>라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거나 좋아하는 소재가 사용되어서 이 영화를 좋아했던 것도 있지만, 이런 <윤희에게>의 매력이 없었다면 열 번 가까이 영화를 돌려보진 못했을 것 같아요.

 

4월 30일에는 메이킹 북이 나온다는 소식입니다. GV 때부터 만월단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감독님의 제작 노트나, 배우 스틸 및 촬영 현장이 담겨 있다고 하네요! 저는 퀴어페미니스트 책방 꼴(https://www.instagram.com/p/B-gjEjVFJTi/?utm_source=ig_web_button_share_sheet)에 예약 주문을 넣었습니다. 당일 바로 가지러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ㅠㅠ 개인적으로 시나리오 북도 너무너무 재밌게 읽었기 때문에 (영화에는 없는 장면들, 나카무라 유코 배우님과 임대형 감독님 인터뷰 등) 이번 메이킹 북도 정말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 이번에 새소년과 윤희에게가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진행한 뮤직비디오도 업로드되었는데, 이에 관해서는 음악 포스트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담이지만 다른 분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셨나 궁금하네요! 저는 퀴어 영화인 동시에 여성서사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윤희에게>는 윤희가 사회의 편견 어린 시선 때문에 쥰과 헤어져야만 했던 성소수자로서의 이야기가 중요하지만, 그만큼 오빠는 가는 대학을 가지 못한 윤희나 담배를 눈치 보며 피워야 했던 장면 등등... 그리고 딸인 새봄이와 함께 오타루를 여행하면서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마지막에 이력서를 제출하며 새 시작을 다짐하는 것까지. 여성으로서의 이야기도 같은 비중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다른 작품에 비해 중년 여성 주연의 퀴어 영화가 적었던 것을 생각하면 <윤희에게>는 한국 영화계에 있어 큰 도전이고, 성공적인 사례였다고 생각해요. 여성 영화로서도, 퀴어 영화로서도요. 앞으로도 <윤희에게>처럼 소수자 이야기를 하는 다른 작품도 많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721847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지금-여기’의 한국소설과 만나는 가장 확실한 패스트 트랙” 등단 10년 이하의 젊은 작가들이 한 해 동안 발표한 중단편소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일곱 편을 선정해 수여하는 젊은작가상. 2010년에 제정된 이래로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글쓰기를 조명하며 ‘지금-여기’의 한국소설과 만나는 가장 확실한 패스트 트랙의 역할을 해온 젊은작가상의 2019년 제10회 수상 작가는 박상영 김희선 백수린 이주란 정영수 김봉곤 이미상이다. 작년에 이어 연속해서 수상자가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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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2019 제 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되어 있는 대상 작품입니다. 동성애자인 영이 운동권 출신인 12살 연상의 남자와 연애를 하고, 기독교인인 어머니를 투병하면서 겪는 일을 적은 소설인데요. 저는 아직 작품집은 다 읽어보지 못했지만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도서관에서 읽은 이래 세 번인가 다시 읽고, 책까지 구매했습니다.

그만큼 제가 이 소설에 꽂혔던 이유는, 영이 겪는 일련의 일들이 보통의 성소수자가 언제든지 겪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작년에 처음 읽었을 때 별별 옛날 생각들이 다 스쳐지나갔던... -.,- 

 

제국주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처음 듣는 단어 앞에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저 당황한 채로 그의 단호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뭔가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았고 내 셔츠나 모자에 박힌 성조기가 처음으로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나의 정치적인 무지가 부끄러웠다기보다는(그딴 걸 부끄러워해본 적은 없으므로) 그가 멍청하고 생각 없는 내 본연의 모습에 질색할까봐, 그래서 다시는 나를 봐주지 않을까봐 두려웠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박상영)

이 글을 쓰기 전에 다른 분들은 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서치해 보았는데, 공개적으로 운영되는 퀴어 블로그의 수가 많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작품을 퀴어적으로 해석하는 블로그가 많지 않은 탓인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은 많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이 소설, 현대에 동성애를 하는 사람이면... 너무 쉽게 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요??

주인공 영의 애인은 영보다 12살이 많고, 한총련 사태를 겪은 마지막 운동권 세대입니다. 같은 운동권이었던 동료들 중에는 정치권에 몸담은 사람들도 있는 사람. 여전히 미제를 싫어하기 때문에 특이하게도 많은 게이들이 좋아한다던 브리트니와 비욘세도 미국 사람이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영이 줬던 티셔츠에 성조기가 그려져있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관계를 갖지 않는 밤을 보냈고, 영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런 것들 따위 별 상관도 없었고, 다만 그냥 그를 안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운동권에 몸담았다고 말할 정도의 사람도 아니지만(끽해야 행사에 자주 참여하고 책을 좀 읽는 정도?) 중학생 때부터 퀴어 이슈에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찾아보곤 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퀴어 친구들이 많아졌고 인권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당시 만나던 친구가 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자기는 꼭 그런 걸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 때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 성향이 강했기에, 당사자면서도 그런 이슈에 관심이 없는 그 모습이 얼마나 한심해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수험생 시절을 거치고, 그 기간동안 퀴어 문화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되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백지가 된 채 성소수자 동아리에 들어간 김제이. 실제 단체에서 활동하시는 선배들부터 플친 구독만 하는 큐브, 아는 퀴어 친구들 오백명인 사람들... 저 분들은 인권에 대해서 너무 잘 아는 것 같은데 정작 나는 고등학교 때 읽은 책들 모두 머릿속에서 휘발된 상태... 그제야 비로소 전에 만났던 그 친구의 마음이 이해됐던 것 같습니다. 부끄럽지만, 내가 다시 습득해야 하는 지식들이 너무 많아서 이런 거 다 집어치우고 그냥 연애만 하면 안되나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나는 정치고 정책이고 하나도 모르는데, 그런 거 말고 나랑 술이랑 마시고 놀면 안되나? 당사자인 내가 그런 문제에 무지하다는 것에 대해 저 사람들이 나를 무지하다고 무시할까 두렵다. 그런 생각들.

 

그 시절, 오로지 통증과 병만이 남은 그녀의 삶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옮겨 쓰는 활동 말고는 다른 어떤 일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박상영)

혐오자인 가족에게 멸시당하는 경험도 많은 성소수자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인 가족을 두고 있다면 더더욱요.

영의 어머니는 기독교인입니다. 투병 중에도 신실한 종교 생활을 하고, 오줌줄이 빠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입니다. 종교 활동이 자신에게 기적을 일으켜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 그리고 영이 동성애자인 것은 정신적 문제이고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영을 정신병원에 데리고 갔고, 그가 동성애자인 것을 알면서도 만나는 이성에 대해 묻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부모와 성소수자 자식 관계는 우리 사회에서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성소수자 친구 대다수는 이런 부모님과 갈등을 겪은 경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JTBC 드라마 <안녕, 드라큘라>가 최근에 많은 레즈비언들에게 공감을 샀던 이유도 어머니와 레즈비언인 주인공의 관계 때문이었죠. 성당에서 아웃팅을 당한 안나는 어머니가 그 후로도 자신의 정체성을 없는 것 취급하는 모습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는 안나가 사회인이 된 이후까지도 계속됩니다. "레즈비언이 나온다는 드라마라길래 신나게 보러 갔다가 멍해져서 나왔다"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그런 실제 성소수자의 모습을 너무 잘 풀어낸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작가님도 이쪽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비퀴어가 다루는 퀴어의 삶이란 어딘가 어색한 감이 있기 마련인데 운동권인 애인의 모습부터 기독교인인 부모와 마음을 나누는 모습까지 너무 우리 삶의 그것이었습니다. 그런 작품이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대상 작품으로 수록되었다니, 우리 사회가 점점 퀴어프렌들리한 사회로 변해가고 있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요.

 

 

<보이 이레이즈드>, 2018 포스터

 

<보이 이레이즈드>는 제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처음으로 보았던 영화입니다. 덕분에 처음으로 넷플릭스 가입도 도전하게 되었네요. 

조엘 에저튼 감독의 <보이 이레이즈드>는 가라드 콘리의 동명 회고록을 원작으로 두고 있으며, 동성애자이자 목사의 아들인 자레드(루카스 헤지스)가 '전환 치료'의 대상이 된 후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커밍아웃한 연예인으로 알려져 있는 트로이 시반이 등장하기도 했는데요! 개인적으로 트로이 시반의 노래를 자주 들어왔어서 감상하다가 헉 하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기성세대에서 전환 치료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과정을 이렇게 세세히 알게 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전환 치료를 진행하는 사람들은 ‘정상적인성별 규범에 들어맞는 사람이 된다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폭행과 폭언으로 사람들을 그 틀에 강제적으로 밀어넣습니다. 작중에서는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조차 이러한 행동이 폭력 행사임을 알기 때문에 내부 사정을 유출하지 않으려고 하기도 했고요.

치료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들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새삼 실감하게 해 준 영화였습니다. 이러한 치료들이 여전히 세계 어느 곳에서는 합법이라는 사실이 절망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작중에서 캐머론이 전환 치료의 대상으로 구타를 당하다가 자레드의 탈출을 도운 다음 날 자살한 장면이 충격적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자레드가 탈출하고 나서 이런 행동을 하고도 캐머론은 저곳에서 버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캐머론이 자살했기 때문이에요. 자레드의 주변에는 호모포비아였다가 마음을 바꾸어 그를 지지해 주기 시작한 어머니가 있었지만, 캐머론은 아무런 지지기반도 없이 사람들 앞에서 구타를 당하거나 수치심을 느껴야 했던 점이 대비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장면들을 보며 성소수자 주변 지지자의 여부가 그들의 생존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실감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러한 장면이 저에게 충격적이었기에, 영화를 보면서 캐머론과 자레드의 환경적 차이점에 대해서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자레드가 어머니에게 자신을 데리러 와 달라고 전화했을 때 어머니가 오지 않았더라면, 자레드는 그곳에서 더욱 집중적인 치료를 받으며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캐머론처럼 자레드 또한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을 지도 모르고요.

성소수자에게 그들을 지지해 주는 주변 인물의 존재는 중요하지만, 그런 지지를 받지 못하는 환경에 처한 성소수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주변에서 그들과 연대하고 지지해 주는 앨라이의 존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가족들이 혐오를 이기고 그들과 함께할 수 있어야겠지요.

 

그렇다면 성소수자에 대하여 무지 상태였던 자레드의 어머니는 어떻게 마음을 바꾸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무지를 해결하고 그들과 연대할 수 있게 될까요?

자레드의 어머니가 계속해서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남편과 종교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는 자레드의 편에서 지지해 주게 된 건 아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레드의 어머니는 성소수자 이슈를 대할 때 내 아들은 그럴 리 없고,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바꾸면 된다는 마인드로 접해 왔었죠. 그러나 자신의 아들인 자레드가 전환 치료 중 도움을 요청했을 때는 바로 달려와 그를 구해 주었고, 바로 전환 치료를 중단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게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요.

이처럼 주변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 중 성소수자가 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주관적인 의견이지만, 사람들이 성소수자에게 지지와 연대의 메시지를 날릴 수 있게 하는 것에는 우리의 주변에도 성소수자가 있다는 인식의 확산이 가장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소수자는 먼 나라 사람들이 아니고 우리 주변에 있으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도 있을 수 있다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더 많은 관심을 주어야 하고,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장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성소수자와 종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종교 활동을 하고 있지 않기에 종교적으로 민감한 부분에 함부로 손을 얹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집안에서 자란 성소수자로서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을 얹어 보면 이렇습니다:

종교에서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것은 그들이 이 시대에서 비교적 덜 가시화된 소수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기성 기독교 집단은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소수자 및 약자들을 차별하거나 박해해 온 일이 많았죠. (이런저런 전쟁이나...) 성경을 근거로 원주민이나 유색인종 등 약자를 탄압했고, 타 집단과 자신들을 비교하고 배타적으로 행동하며 종교 집단 내 결속력을 높였습니다.

세계화가 이루어지고 인종차별이 죄로 취급되는 현대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내부 결속을 공고히 하기 어렵습니다. 여전히 성소수자에 대한 문제가 찬반의 영역에 오르내리고 있는 지금에는 그 대신, 성소수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닐까요? ‘동성애는 죄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동성애를 하지 않는사람들은 교리를 잘 따르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잣대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최근에 <인권옹호자 예수> (김지학, 2018) 라는 도서를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기성 기독교 집단의 혐오적 주장을 성경 구절을 근거로 반박하고 있는데요. 결론은, 기성 기독교는 성경 구절을 취사 선택하고 있고, 성경 구절은 '취사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 공부를 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저자 왈 실제로 성경에서는 전도 활동에 방해가 되니 결혼하지 말아라라는 구절이 있는 동시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각 구절이 쓰인 시대적 상황이 다르기 때문인데요. 또한, 성경은 현대와 맞지 않는 여성 혐오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성경 구절을 문자 그대로 따르기는 힘들다고 합니다. 저자는 성경은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사람이 기록했기 때문에 모순된 부분도 있을 수 있고 오류도 있을 수 있지만, 성경을 읽는 각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한다고 믿는 편이 더 좋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렇게 인식할 때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저자에 의해 축적된 경험과 지혜를 지금 이 시대에 사는 나에게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용: <인권옹호자 예수> (김지학, 2018))

 

 

 

 

<문라이트>, 2016 포스터

 

이 달 초에 퀴어 앨라이 동아리에 소속되게 되면서 정기적으로 하게 된 활동 중 영화 감상 후 발제가 있었고, <문라이트>는 그 두 번째 활동의 영화입니다. 과제하랴 할 일 하랴 바빠서 첫 감상은 급하게 한 감이 없잖아 있는데... 기록용으로 글을 올려보고자 합니다. 줄거리는 따로 정리하듯 올리지 않기로...

문라이트는 마이애미를 배경으로 한 흑인 소년의 성장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흑인이고, 동성애자이자, 마약 중독 어머니를 둔 빈민인 샤이론이 성장하는 모습을 그렸는데요. <멜랑콜리의 묘약> 배리 젠킨스 감독이 8년 만에 연출한 영화로, 인종/성소수자/빈민 등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는 i. 리틀 / ii. 샤이론 / iii. 블랙 세 가지 구조로 나뉘어 있어, 샤이론의 세 시절을 보여주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 마.”

 

 

작중에서 주인공인 샤이론의 조력자로 등장했던 후안이 어린 시절의 샤이론에게 해 주었던 말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니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 말라고요.

이를 시작으로, ii. 샤이론에서 성장한 샤이론은 블랙의 네가 누구냐는 물음에 나는 나지.” 라고 대답합니다. 리를, 샤이론 등 불리는 이름은 달라도 샤이론은 자신이 자신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샤이론은 흑인인 동시에 체구가 작았던 동성애자이며, 마약 중독인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소년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일면에 집중하여 샤이론을 무시하고 학대하며, 리틀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러나 그런 이름에도 불구하고, 샤이론은 자기 자신을 자신 그 자체라 정의합니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장면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iii. 블랙 마지막 장면에서 어린 샤이론이 파란 달빛을 받고, “달빛 아래에선 어떤 인종도 모두 파랗게 보인다라는 대사를 떠올리게 했던 것이 가장 인상깊었습니다. 이는 i. 리틀에서 후안이 샤이론에게 수영을 가르쳐주고 대화를 나누며 했던 대사인데,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 마"라고 말하기 전에 말했었죠.

 

 

세상에는 인종차별, 여성혐오, 성소수자 혐오 등 다양한 혐오를 가지고 차별을 하는 사람들이 많고, 최근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성소수자 관련 이슈에 대해 오래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2010년도 중반에 많은 사람들이 성소수자와 연대하고 지지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과정에서 '교차성 페미니즘'이 대두되기도 했는데요.

교차성 페미니즘을 간단히 말하자면, 여성 정체성과 동성애자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단순히 여성혐오+성소수자 혐오만 받는 것이 아니라, 여성 동성애자로서 받는 복합적인 혐오가 따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페미니즘 분파입니다. 억압을 맥락상의 특이성, 맥락에서 얽힌 복잡함, 구체성을 보아야 한다는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2020년 최근, 어떤 사람들은 각각의 문제들은 전부 개별의 문제며 동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비치기도 합니다. 트랜스젠더는 여성이 아니기 때문에 참여할 수 없는 여성 전용 행사, 퀴어 문화 축제에서는 성소수자 이야기만 해야 하는데 페미니즘 이야기를 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그 예시입니다. 서로 다른 소수자는 연대할 수 없을까요?

 

 

저 자신이 교차성 페미니스트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페미니즘에 밝은 사람은 아니지만, 교차적으로 생각해야겠다고 다짐했던 계기가 있습니다.

중학교 때 여자를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그 때부터 꾸준히 성소수자에 대해 공부했고, 이는 주위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해 알게 된 건 그보다 조금 나중의 일인데, 주변 어른들에게 말하니 "여자를 좋아해서 꼬시려고 페미니스트 하는 거냐"는 대답이 돌아오던... -.,- 정말 사소하지만 이 일이 있고 나서 내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퀴어로서의 정체성을 둘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들었던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관적인 의견이지만 전술한 퀴어 문화 축제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면... 적어도 제가 당사자성을 가진 여성과 성소수자에 한해서는 두 집단이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여성혐오 문제와 성소수자 문제는 공유하는 부분이 많으니깐요. 성별 고정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에 여성과 성소수자는 모두 차별을 받습니다. 최종적인 목표는 모두 <차별받지 않고 인간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향하는 방법은 달라도 연대하고 타협해 나가며 최종 목표로 달려가는 것이 모두에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bgm: カタオモイ (cv. 김달림과하마발)

Aimer - カタオモイ의 가사를 일부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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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목소리.
 하나.
 둘.
 눈에서 피는 매화.
 셋.

 피지 않는 벚꽃.
 넷.
 제트나무.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점2분쉼표.
 아홉.
 멋대로 흐르는 의식.

 열.
 멋대로 흐르는 시간.





 
 그는 스스로를 소년이라고 지칭할 때가 종종 있었지만 가만 돌아보면 소년이라기엔 너무 먼 길을 걸어왔다. 6000살의 생일을 맞이했었지. 6000년의 세월을 걸어온 동안 이 손은 무수한 죄를 저질렀다. 그리고 제트는 그가 평생에 걸쳐 빚어낸 죄다. 빚어냈던, 빚어낸, 지금도 빚어지고 있을.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온전하지 않은 죄악. 스스로를 소년이라 지칭하기에 자신은 어떤가 생각한다. 앞으로 무수한 세월이 남았기에 저는 소년인가? 아니면 끝없는 죄를 지은 세월이 너무 길어 소년이라고 할 수 없나? 냉동실에 수십 시간을 얼려 질겨진 고기처럼 잘리지 않는 생각을 하다 마침내 큰 식칼로 도마 위를 텅 내리친다. 언제까지고 소년인 자여, 당신은 이전에 있었던 시간도 이후에 있을 시간도 전부 동일하게 살지 않을 것인가.

 누군가와의 대화는 언제나 소년의 온전치 않은 독백으로 흘러갔다. 빠른 속도로 테이블 위를 오가는 탁구공처럼 원활한 대화가 진행된다. 화자가 원하기도 하고 원하지 않기도 했던 곳으로 공이 튀어나간다. 다음 화자는 유하게 그 공을 받아친다. 그러다 누군가의 손이 살짝 삐끗한다. 보내고 싶지 않은 어떤 곳을 향해 공이 활주한다. 모든 공을 문제 없이 받아치던 소년은 공이 그 방향으로만 날아가면 몸이 굳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소년이 공을 주워 다시 서브를 넣기 전까지는, 테니스 테이블 위에 공이 올라오는 일은 더 이상 없다. 당신이 소년의 손에 공을 쥐어주고 일으켜주지 않는 이상 소년이 스스로 일어서는 일은 없다.

 소년은 그렇게 늘 독백을 했다. 대화가 어긋난 이후엔 어떤 말을 해도 정해진 스크립트를 읊는 기계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스크립트가 완벽한 논리를 갖추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대화인가? 아니다. 대화가 아닌가? 아니다. 그는 변하는가? 응. 아니. 매화를 좋아하나? 아니. 응. 벚꽃은 언제 피지? 봄. 아니 봄이 아닐 때. 좋을 때. 좋지 않을 때. 제트는? 죽었어. 아니 살아있어. 제트는? 내가 죽였어. 아니 죽이지 않았어. 죽었어. 죽었지만 살아있어. 살아있지만 죽었어.

 당신이 꽃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린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한다. 당신의 죽음, 소년의 꼬리 위에 만개하는 벚꽃, 당신의 죽음 이후에 벚나무를 심어달라는 당신…… 언젠가 꽃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매화를 좋아한다고 그랬던 것 같다. 그 날 당신과는 수명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던 것 같다. 소년은 제 수명을 살아갈 이유로 제트를 꼽는다. 제트는 상황이 나아질 수 없잖느냐, 하는 당신의 말에 소년은 화제를 전환한다. 그래서 장미 얘기가 나왔다. 소년은 오래 전 자신의 전 애인에게 선물했던 꽃을 떠올린다. 붉은 장미…… 격정적으로 사랑을 속삭였던 풋풋한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제 와서는 제트에게 주지 못했던 장미가. 소년과 소년 사이에는 보라색 장미가 어울릴 거라는 당신의 빈정 섞인 말. 아, 그렇지, 또 제트. 제트. 제트를 다시 떠올린다. 소년은 다시 제트를 생각한다. 마치 술에 절여진 뱀처럼 관 안에 우두커니 눈을 감고 있을 다른 소년을 생각한다. ……구태여 말하자면 보라색 장미는 영원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갖고 있죠. 죽은 동시에 살아있을 제트를 걱정하며 독백을 시작한다. 그가 내 꼬리에 핀 꽃을 봤으면 좋겠어요. 장미보다는 더욱 의미있는 꽃이거든요. 그러자 당신이 대답한다. 그러려면 살아서 돌아가야겠구나. 맞아요, 살아서 돌아가야지요. 소년이 말을 받아친다…… 아, 필요없는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을 그제서야 눈치챈다. 살아서 돌아가도 말이지요…… 급하게 말을 정정한다. 봤으면, 했었습니다. 그런 희망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자연스럽게 넘기려고 한다. 물론 당신에게 그런 말이 통할 리가 없다. 당신의 표정이 말한다. 꼬리를 물어.

 하하, 하…… 소년은 웃는다. 그래 제트는 살아있어요.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동시에 죽었지요. 당신은 모를 액체가 가득 차 있는, 무덤 같은 관에서 꼬리를 축 내리고 눈을 감고 있어요.






 아주 오랜 시간 제트를 올려다봤습니다. 늘 그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지요. 어린 마음에 몇 년이고 위험한 일을 하면서까지 제트를 따라다녔습니다. 그가 나를 알고 알지 못하고는 상관없이 하고 싶어했던 모든 일들을 그가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내가 유일하게 막고 싶었던 것은 그의 죽음이었어요. 그래서 단신으로 사막을 걷는 그를 쫓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죽기까지 했고, 동료의 도움으로 다시 한 번 삶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제트의 생에 절박했습니다. 내 생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였어요. 그런데 그가 나를 처음으로 기억했을 때 한 말이 뭐였는지 아시나요.

 죽고 싶어. 살고 싶지 않아. 지키던 생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에 대한 나의 절망. 나는 몇 번이고 그의 죽음을 막았습니다. 그러면 그는 다시 스스로를 포기했지요. 6000년이라는 세월에 비해 1년도 안 되는 시간은 정말 짧습니다. 그 시간 동안에 우리는 점점 인위적으로 껍질이 벗겨진 도마뱀처럼 말라갔습니다. 나는 그가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기를 바랐고요. 그러나 생에 대한 문제만큼 본인의 의견이 중요한 것도 없는 법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자살기도를 했던 날 나는 가까스로 그를 살려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울었습니다. 제발 죽지 말라고. 당신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 거라고. 그 말에 그는 답했습니다. 자신은 바다에 가고 싶다고. 편해지고 싶다고. 그 부탁을 내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요. 그게 자신의 행복을 향한 단 하나의 길인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감히 내가 그걸 뒤흔들 권한이 있었을까요. 다만 나는 그런 부탁을 들어줄 정도로 용기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일조차 타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어? 제트에게 말이야. 아니면 마지막 말을 남길 수 없을 정도로 후회해? 
 그를 바다로 보낼 기계를 만지던 자가 내게 물어보았습니다.
 ―후회해. 후회하고말고. 내가 마음을 더 강하게 잡고 그를 말렸어야 했어. 죽지 않는 방향으로 어떻게든 보낼 수 있었을텐데.
 ―이제라도 작업 중단할까.
 ―아니…… 그러지 마. 그건 그의 행복을 앗아가는 일이니까.

 어떻게 하면 그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할까.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죽음은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그는 이야기했는데 나는 그의 행복에조차 기뻐할 수 없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나 하고요. 왜 나는 이기적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 모두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러던 중 찾은 방법은 ‘제트’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기계에 그를 넣고 편히 잠들게 하는 것 이상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제트Z라는 사람만 없는 걸로 하고, 그 몸뚱아리에는 완벽히 새로운 이름과 인간관계, 그리고 과거를 부여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트는 죽은 것이고 그는 살아있는 것이지요. 아, 벌써 그에게 붙여줄 이름도 정해놨는데. 자영紫英이라고, 보라색 석영을 의미합니다. 이미지 컬러도 완전히 정반대죠? 그만큼 그가 반대되는 삶을 살 거라는 거예요. 제트Z였을 시절 그로 하여금 사막을 걷게 했던 끔찍한 인간관계가 아닌, 그가 다시 살아나서 행복하고 온전할 수 있게 하는 일반적인 인간관계도 함께 제공할 겁니다. 사회에 적응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게 능력에 맞춘 사회적 지위도 설정할 거예요. 반사회적 조직에서 금전을 요구하며 치료를 일삼지도 않게 할 겁니다. 내가 어떻게든 돈과 권력을 쓰면 그 한 명에겐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그럼 이 우주에서 Z라는 존재는 완전히 잊혀지겠죠, 그렇게 되면 비로소 Z는 죽었지만 자영은 살아있는, 나도 그도 바다에서 천천히 불어오는 파도를 여유롭게 즐기고 있는 듯한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아, 제트는 없어요. 그는 죽었습니다. Z를 죽인 나는 죽여달라는 약속을 어기지도 않은 채, 살아있는 자영에게 다시 돌아가 그의 새로운 인간관계의 한 부분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 나는 이기적이지요. 이도저도 아닌 선택을 하는 주제에 그걸 합리화하기나 하고요. 사실 조금 두려워요. 모든 것을 설정해놓은 뒤 그를 깨우면 그가 과연 내 뜻처럼 잘 따라줄까 싶어서요. 무엇을 어떻게 손대야 그가 다시 무너지지 않을까…… 하고. 물론 제트의 지인이었던 당신에게는 내 말이 그저 살인자의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겠지만요.

 다만 그가 자영으로서 살게 되면 적어도 예전보다는 근사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자영에게는 그를 8000년이 훌쩍 넘는 세월동안 그를 착취할 사람이 없으니깐요. 그의 능력을 악의적 목표에 동원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사람들도 없을 테고, 그가 무너지는 동안 그를 방관했던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 자리를 채울 더 좋은 사람이 많아요. 그가 눈을 뜨면 나와, 내 지인과, 여태 보지 못한 좋은 질의 사람들과 환경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을 겁니다. 드러나는 부분에서는 능력과 이름, 과거부터 몸의 형태도, 사회적인 지위도 전부 변할 거고요. 제트와는 모든 게 다른 소년을 어떻게 제트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는 더 이상 제트가 아닙니다.

 내 꼬리에 꽃이 피는 조건이 무엇이냐고 물었지요. 별 거 없습니다. 늘 사계절을 따라 잎이 돋고 꽃이 폈고, 꽃이 진 자리에는 버찌가 맺혔으며 겨울이 되면 으레 다른 나무가 그렇듯 낙엽이 지고 앙상해졌습니다. 지금 내 꼬리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최근 오랜 시간 사계가 없는 곳에서 생활했기 때문이고요. 자영의 삶도 그렇게 흘러갈 겁니다. 완전히 모든 것을 예상할 수는 없지만 적당한 폭에서 평화롭게 흘러갈 테지요. 누군가가 그에게 제트였던 과거를 굳이 알려주지만 않으면 그는 멸망까지도 그만큼의 불행을 느끼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블랑케를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했었지요. 쥐새끼마냥 빈집털이를 하러 들어왔다가 제트가 있는 방을 목격한 사람이거든요. 나는 그가 ‘레이’가 아님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 어떻게 하면 그를 죽일 수 있을지 계속 궁리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제트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은 나와 유월뿐이어야 했거든요―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다 잊을 생각이었고요. 블랑케에게 깊은 혐오를 느끼는 당신의 힘을 빌려 그를 제거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당신 앞에서 말하고 있는 이상 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군요. 이런 제트 살인마를―당신이 왜, 도와주겠습니까.

 당신이 지금 나를 어떤 표정으로 보고 있을지 조금도 감이 안 잡히네요. 왜냐하면 지금 나는 최대한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않고 이야기하려고 노력하고 있거든요. 제트는 죽었다, 동시에 살아있다. 처음부터 제트의 사망을 알리려고 온 자가 그 손놀림의 주체였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웃기네요. 알아. 안다고요.


 난 누구에게도, 심지어 나 자신과 제트에게 용서받을 무엇도 없는 사람이란 걸.
 그럼에도 나는 이 합리적인 일을 감행해야겠다고.

 





 아, 소년은 종종 탄식했다. 나는 사람을 죽인다. 정작 죽여야 할 때는 죽이지 못하면서 아무도 요청하지 않은 때에는 멋대로 죽인다. 그리고는 표면이 언 호수 같은 죄책감에서 숨만 내뱉는다. 질식한다. 아주 간신히 날이 따스해지면 그만큼 간신히 수면으로 떠올라 호흡한다. 다시 기온이 낮아지면 죽기 직전까지 숨을 내뱉는다. 그리고 간신히 돌아본다. 당신에게 말을 건넨다.


 외면하려던 것을 돌아보게 해서 기분이 좋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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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안녕, 나의 少年


Jaivant









    소년이라고 하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먼저 아주 어리지도 성숙하지도 않은 남자아이라 했는데, 남자고 여자고 하는 개념은 애당초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접어두고 넘어가겠습니다. 그 다음으로 보편적으로 말하는 정의는 젊은 나이, 또는 그런 나이의 사람이라 하였는데, 나이 역시 내겐 젊고 늙음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진 못하니 내려놓겠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소년이란 말을 즐겨쓰는 이유는 그게 少年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적은 시간. 스쳐 지나갈. 한 방울의 바닷물이 내 각막을 적실 정도로 작고 고통스러운. 나의 손 끝 바늘에 찔린 구멍 같은 아픔. 그 자그마한 少年, 살을 짓눌러 멍들게 하는 시간. 당신의 숨소리, 맥박 뛰는 소리, 자그마한 분자 하나하나가 진동하는 소리, 그 모든 것.


    소녀 같은 건, 소년스러운 건, 어울리지 않아. 그저 네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넌 혼자 남는걸. (김사월, 수잔) 낡고 병든 내게 당신이 준 꿈은 부서질 것 같이 완전한 빛깔. (김사월, 악취)


    재떨이엔 꽁초만 쌓여가고, 아무것도 없는 벽을 뚫어져라 봐. 빈 속을 어지럽혀, 위스키로 정신이 더욱 흐릿해지길 바라. (용준형, 지나친 사랑은 해로워) 차가운 바람 소리에, 하얀 입김으로, 하얀 담배 연기에, 아련한 너

의 영상. 난 어지러워, 난, 난, 난, 어지러워, 난, 난. (푸른 새벽, 푸른 새벽)


    슬픈 생각이 지겨워, 나는 제멋대로 지냈네. (김사월, 달아) 내 못난 마음 꿈에서는 다 용서해 주세요, 내 못난 마음 꿈에서는 다 용서해 주세요. (김사월, 접속) 이제 잠이 들 거예요, 깊은 꿈 속에 빠져들게 날 놓아줘요. 고요한 심연 속에 몸을 누이고 (태민, 최면) 꿈꿀 수 있다면 어디라도 시들어가는 걸 알았기에, 나를 원한다면 언제라도 (김사월, 꿈꿀 수 있다면 어디라도) 너만 내게로 온다면 그대에게 이 세상을 다 줄 수 있을 텐데. (헤이즈, And July) 내 못난 마음 꿈에서는 다 용서해 주세요, 내 못난 마음 꿈에서는 다 용서해 주세요. (김사월, 접속)


    슬픈 생각이 지겨워, 몸이 타오르는 것 같아.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믿고 싶어. (김사월, 달아) 우리들은 조심스레 키스를 했어, 그런데 당신은 조금 싫어했었지만 우리들은 꼭 끌어안았어. 그럼에도 아직 부족하네, 라며 눈짓했어. (하츠네 미쿠, 목소리) 필름처럼 흘러가는 가로등 불빛, 내가 지나치는 건 아마 미련이겠지 (비스트, Drive) 그 떄로 돌아가, 새로 만들어가, 더 이상 비참하지 않고 혼자 아닌 (버논, 병) 너는 지금 잠들어 있겠지만, 너와 함께 닿는 모래를 생각해. 가망 없는 너와 잠시라도, 꿈꿀 수 있다면 어디라도. (김사월, 꿈꿀 수 있다면 어디라도) 스스로를 미워하며 살아가는 것은 너무 달아, 그걸 끊을 수 없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김사월, 달아)


    대화하기에는 너무 늦었나? 내가 너무 오래 기다렸나? (Nicki Minaj, The Crying Game) 그 때 아끼는 모든 것을 깨뜨린 나를 살려두었나요 왜 용서해 줬나요. 그 때 악취 나는 손으로 더럽힌 나를 살려두었나요 왜 용서해줬나요. (김사월, 악취) 자유로울 거라고 했죠, 그래 바람이 거세어 어디든 갈 수 있을것만 같아요. (김사월, 설원) 너의 어디가 정확히 그리운지 사실 잘 모르겠지만 그리워 (용준형, 지나친 사랑은 해로워) 날 천천히, 삼키네, 벗어나려 해도 제자릴 맴도네. 난 조금씩 잠기네, 숨이 막혀도 움직일 수 없네. (윤화, 파도) 너무 멀리 왔나 봐, 길을 잃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그댈 목 말라해 (장나라, 사막 한가운데에서) 그냥 이대로 다 멈춰 줘 제발 너의 뒷모습 뿐이라도 좋아 (빅톤, 나를 기억해)


    도저히 버리지 못한 네 향기 가득한 물건들 (볼빨간 사춘기, X Song) 들꽃 향기가 나네요, 아니 들꽃이 아니라 들꽃이라 부르는 향기가 나요. (김사월, 설원)


    아, 소년, 소년, 소년의 향기. 녹음綠陰, 짙은 녹음, 녹음이라 부르는 그림자. 들꽃, 들꽃의 향기, 들꽃이라 부르는 향기. 날 삼켜요. 서서히 잠기게 만들어요. 그래 나를 조이나. 숨 막히도록 조여오지요. 소년, 소년, 아냐, 소년스럽다는 것도 소녀 같은 것도 당신과 어울리진 않지. 숲을 닮은 소년, 아니 숲이라는 공간을 지향했을 소년. 바다를 찾던 소년, 아니 바다라는 공간을 갈망했을 소년. 몸에 밴 내기, 아니 내기라고 불리는 행위를 적셔 왔던 소년. 소년, 소년, 사전적 정의 따위는 그저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던. 그 빈 껍데기에 갇힌 자를 타오르게도, 얼어붙게도, 언어가 없는 향에 취하게도 했던. 무수한 분모를 밑에 둔 그 하나의 시간. 억겁의 세월을 타고 올라 그 위에 유유히 군림했던 찰나. 종결 어미가 없었던 나를 잠재우고 한 번의 만짐으로 분할한 소년. 그 찰나의 시간. 안녕, 손을 흔든다.



    나는 너에게 메달려

    너는 나를 끌고

    우리는 사막에 왔다

    우리는 사막에 왔다

    (중략)

    이러다가 목이 마르는 건 아닐까

    이러다가 목이 메이는 건 아닐까


(김사월X김해원,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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