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니키다 돗포 <쇠고기와 감자>를 읽고 과제 레포트 제출했습니다.

 


 

 

구니키다 돗포의 <쇠고기와 감자>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닌텐도 게임 <동물의 숲>의 마스코트 격 캐릭터인 너굴이었다. 플레이어에게 자택의 증축을 강권하여 수백만에 달하는 돈을 벌어들이고,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부동산과 관광 등 각종 사업에 손대며 거금을 벌어들이는 NPC. 동물의 숲 시리즈 플레이어에게는 돈에 눈이 멀어버린 너구리라는 인식이 박혀 있을 정도다. 이런 너굴에게도 꿈과 이상이 자신의 모든 걸 지배하던 시기가 있었다. 젊었을 적 너굴은 꿈을 이루기 위해 고향을 떠나 도시로 향했지만, 콘크리트 정글과 같은 도시 세계에서 모든 걸 잃는다. 그는 소꿉친구의 위로와 격려도 거절하고 꿈만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며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쇠고기와 감자>에 빗대어 보자면, 본래 홋카이도 이주를 동경했으나 결국 현실에 안주하게 된 가미무라와 비슷한 처지인 것이다.

<쇠고기와 감자>에서 가미무라는 홋카이도 이주에 관해 이야기하며 자신이 현실에 안주하게 된 계기를 설명한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가미무라는 청교도인을 자처하고 홋카이도 이주라는 이상을 꿈꾸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홋카이도에 도착해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이상과 전혀 달랐고, 가미무라는 1년 만에 홋카이도를 떠나 이상을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이때 가미무라를 포함한 등장인물들은 현실과 이상을 비프 스테이크의 쇠고기와 부속물인 감자로 비유한다. 쇠고기는 스테이크의 주요한 재료이고 감자는 그 부속물로, 아주 중요한 재료는 아니라는 점에서 착안한 비유다. 가미무라는 자신이 이상을 좇다가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로 스스로를 쇠고기당이라고 지칭한다.

사람에게 어느 정도 이상이 있다는 건 그 사람이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미무라의 현실주의적인 태도를 마냥 세속적이라고 비판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가미무라가 감자보다 쇠고기를 택하게 된 건 가치관이 바뀔만한 상황을 겪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어느 정도의 현실주의는 이상을 이루기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 현실을 직시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힘을 키울 방안을 찾아가는 것이 무턱대고 이상을 좇는 것보다 성공률이 높기 때문이다.

예의 가미무라는 쇠고기를 먹는 게 더 편하고 즐거운 길이라는 뉘앙스로 가볍게 말했지만, 조금 더 무겁게 이야기해 본다면 생존을 위해서 세속주의는 필요하다. 가령 전술했던 너굴의 경우에도, 작품 내외적으로 속물이라고 비난받고 있지만 잔혹한 도시의 세계에서 크게 데이고 모든 걸 잃은 사람은 세속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가미무라의 경우에는 홋카이도에서 현실의 벽을 마주하고 돌아왔을 뿐이지만 이상만 추구할 경우 너굴처럼 모든 걸 잃어 더 이상 이상을 추구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사람은 현실을 직시하고 이상을 실현할 기반을 다져야 한다. 가미무라의 친우였던 가지무라가 감자보다는 쇠고기가 자양분이 많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현실을 추구하는 것은 스스로의 능력을 다지고 이상을 추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무턱대고 이상을 추구하기보단 자리가 잡힐 때까진 현실을 추구해야 일말의 이상조차 잃은 비인간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다. 너굴이 도시에서 모든 걸 잃고 돌아와서 세속적인 사람이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젊었을 적의 패기를 조금만 더 가라앉히고 더 많은 걸 준비하여 도시로 향했다면 지금만큼 속물로 지칭되며 사람들에게 비난받지 않았을 것이다. 가미무라 또한 현실적인 기반을 다지고, 홋카이도의 부정적인 일면까지 공부하고 조사했더라면 그 때 같은 실패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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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지금-여기’의 한국소설과 만나는 가장 확실한 패스트 트랙” 등단 10년 이하의 젊은 작가들이 한 해 동안 발표한 중단편소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일곱 편을 선정해 수여하는 젊은작가상. 2010년에 제정된 이래로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글쓰기를 조명하며 ‘지금-여기’의 한국소설과 만나는 가장 확실한 패스트 트랙의 역할을 해온 젊은작가상의 2019년 제10회 수상 작가는 박상영 김희선 백수린 이주란 정영수 김봉곤 이미상이다. 작년에 이어 연속해서 수상자가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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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2019 제 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되어 있는 대상 작품입니다. 동성애자인 영이 운동권 출신인 12살 연상의 남자와 연애를 하고, 기독교인인 어머니를 투병하면서 겪는 일을 적은 소설인데요. 저는 아직 작품집은 다 읽어보지 못했지만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도서관에서 읽은 이래 세 번인가 다시 읽고, 책까지 구매했습니다.

그만큼 제가 이 소설에 꽂혔던 이유는, 영이 겪는 일련의 일들이 보통의 성소수자가 언제든지 겪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작년에 처음 읽었을 때 별별 옛날 생각들이 다 스쳐지나갔던... -.,- 

 

제국주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처음 듣는 단어 앞에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저 당황한 채로 그의 단호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뭔가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았고 내 셔츠나 모자에 박힌 성조기가 처음으로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나의 정치적인 무지가 부끄러웠다기보다는(그딴 걸 부끄러워해본 적은 없으므로) 그가 멍청하고 생각 없는 내 본연의 모습에 질색할까봐, 그래서 다시는 나를 봐주지 않을까봐 두려웠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박상영)

이 글을 쓰기 전에 다른 분들은 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서치해 보았는데, 공개적으로 운영되는 퀴어 블로그의 수가 많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작품을 퀴어적으로 해석하는 블로그가 많지 않은 탓인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은 많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이 소설, 현대에 동성애를 하는 사람이면... 너무 쉽게 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요??

주인공 영의 애인은 영보다 12살이 많고, 한총련 사태를 겪은 마지막 운동권 세대입니다. 같은 운동권이었던 동료들 중에는 정치권에 몸담은 사람들도 있는 사람. 여전히 미제를 싫어하기 때문에 특이하게도 많은 게이들이 좋아한다던 브리트니와 비욘세도 미국 사람이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영이 줬던 티셔츠에 성조기가 그려져있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관계를 갖지 않는 밤을 보냈고, 영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런 것들 따위 별 상관도 없었고, 다만 그냥 그를 안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운동권에 몸담았다고 말할 정도의 사람도 아니지만(끽해야 행사에 자주 참여하고 책을 좀 읽는 정도?) 중학생 때부터 퀴어 이슈에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찾아보곤 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퀴어 친구들이 많아졌고 인권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당시 만나던 친구가 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자기는 꼭 그런 걸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 때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 성향이 강했기에, 당사자면서도 그런 이슈에 관심이 없는 그 모습이 얼마나 한심해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수험생 시절을 거치고, 그 기간동안 퀴어 문화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되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백지가 된 채 성소수자 동아리에 들어간 김제이. 실제 단체에서 활동하시는 선배들부터 플친 구독만 하는 큐브, 아는 퀴어 친구들 오백명인 사람들... 저 분들은 인권에 대해서 너무 잘 아는 것 같은데 정작 나는 고등학교 때 읽은 책들 모두 머릿속에서 휘발된 상태... 그제야 비로소 전에 만났던 그 친구의 마음이 이해됐던 것 같습니다. 부끄럽지만, 내가 다시 습득해야 하는 지식들이 너무 많아서 이런 거 다 집어치우고 그냥 연애만 하면 안되나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나는 정치고 정책이고 하나도 모르는데, 그런 거 말고 나랑 술이랑 마시고 놀면 안되나? 당사자인 내가 그런 문제에 무지하다는 것에 대해 저 사람들이 나를 무지하다고 무시할까 두렵다. 그런 생각들.

 

그 시절, 오로지 통증과 병만이 남은 그녀의 삶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옮겨 쓰는 활동 말고는 다른 어떤 일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박상영)

혐오자인 가족에게 멸시당하는 경험도 많은 성소수자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인 가족을 두고 있다면 더더욱요.

영의 어머니는 기독교인입니다. 투병 중에도 신실한 종교 생활을 하고, 오줌줄이 빠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입니다. 종교 활동이 자신에게 기적을 일으켜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 그리고 영이 동성애자인 것은 정신적 문제이고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영을 정신병원에 데리고 갔고, 그가 동성애자인 것을 알면서도 만나는 이성에 대해 묻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부모와 성소수자 자식 관계는 우리 사회에서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성소수자 친구 대다수는 이런 부모님과 갈등을 겪은 경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JTBC 드라마 <안녕, 드라큘라>가 최근에 많은 레즈비언들에게 공감을 샀던 이유도 어머니와 레즈비언인 주인공의 관계 때문이었죠. 성당에서 아웃팅을 당한 안나는 어머니가 그 후로도 자신의 정체성을 없는 것 취급하는 모습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는 안나가 사회인이 된 이후까지도 계속됩니다. "레즈비언이 나온다는 드라마라길래 신나게 보러 갔다가 멍해져서 나왔다"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그런 실제 성소수자의 모습을 너무 잘 풀어낸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작가님도 이쪽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비퀴어가 다루는 퀴어의 삶이란 어딘가 어색한 감이 있기 마련인데 운동권인 애인의 모습부터 기독교인인 부모와 마음을 나누는 모습까지 너무 우리 삶의 그것이었습니다. 그런 작품이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대상 작품으로 수록되었다니, 우리 사회가 점점 퀴어프렌들리한 사회로 변해가고 있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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